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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젖이 모자라진 않니?" - 모유 수유에 대하여
    캐나다임신출산육아 2021. 1. 24. 02:13

    캐나다에서는 한국에서보다 더 모유 수유를 강조하는 분위기이다. 분유 회사 광고나 팜플렛에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은 모유라는 말이 꼭 적혀있고, 의사도 가능한 모유 수유를 권한다. 출산 후 거의 바로 젖을 물리게끔 하고, 하루 입원해있는 동안에도 간호사가 시간마다 들어와 비몽사몽 하는 우리와 아기 모두를 깨워가며 모유 수유 직수를 시킨다. 이전에 다른 글에도 적었듯 퍼블릭 널스가 집에 방문하는 등 모유 수유 관련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한국은 여성 인권이 높아 남녀가 평등하게 육아를 부담하기 위함인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아니면 분유 회사 마케팅의 승리인지 모유를 고집하는 분위기는 아니며 오히려 분유가 영양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듯 하다.

    병원에서도, 집에 방문한 퍼블릭 널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가슴을 열어제끼고 모유 수유를 했고, 그들이 가슴을 만져가며 자세를 바로 잡아주었다. 한국에서 목욕탕도 안 다니던 나였기에 낯선 일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한국 가족들과 통화할 때 아빠가, 어머님이 젖이 모자라진 않느냐고 물어왔을 땐 뭔가 좀 더 어색했달까, 불편했달까. 왜일까..? 내가 예민한걸까?

    첫 번째. 가족과 대화에서 언급된 적 없었던 내 가슴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 공적인 영역이 되어있어서. 모유 수유를 하는지, 젖은 잘 도는지, 잘 나오는지. 고 설리가 노브라로 인스타 사진을 올렸다가 그렇게나 악플에 시달렸던 걸 봐도 알 수 있듯 가슴은 감춰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갑자기 다들 가슴과 젖의 안녕을 물어오다니요. 아기가 밥을 잘 먹는지, 잘 크고 있는지 정도의 질문이면 될 것 같은데 굳이 젖이 잘 나오는지 물어봐야 하나 싶고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젖'이라는 단어도 낯설고. 내 가슴이 공공재가 된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모유 수유를 감춰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것 역시 아니다. 최근 읽은 김금희의 소설 <복자에게>에는 모유 수유를 하며 재판을 진행한 법관이 나온다. 법원장이 "판사가 재판장에서 가슴을 까고 있으면 재판이 엄중하게 이뤄지겠나?" 라며 그만두게 하자 그 법관은 "가슴이 아닙니다, 젖입니다. 한 생명을 책임질 젖이라고요." 라고 항변한다. 모유 수유를 위해 가슴을 내보이는 것을 성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역겹다. 다만 내 가슴=젖인데 왜 다르게 구분짓는지, 가슴은 성적인 것이고 젖은 성스러운 것이라는 그 흑백의, 이분법적 프레임 자체에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두 번째. 젖이 모자라진 않느냐는 질문에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고, 자존심이 상했다는 그 사실에 놀랐다. 모유를 먹일 것인지, 분유를 먹일 것인지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나도 알게 모르게 모유를 잘 먹여야 좋은 엄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걸까? WHO와 유니세프의 권고사항에 따르면 생후 첫 6개월은 모유만을 먹일 것을 권장하고, 생후 2년이나 그 이후까지도 이유식/유아식과 함께 모유를 병행해도 좋다고 한다. 21세기 첨단 과학 시대에 아직도 모유보다 뛰어난 분유를 만들지 못해 모유 수유를 권장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지만.. 어쨌거나 분유만 먹이고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자란 아기들이 많다. 모유든 분유든 엄빠와 아기에게 잘 맞는 것을 택해 잘 먹이고 잘 큰다면 아무 문제 없는데. 더구나 많은 경우 모유, 분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주변에서 모유 수유를 하고 싶지만 못하게 된 경우와 분유 수유를 하려고 했지만 아기가 거부한 경우를 모두 보았다. 유명 쉐프인 제이미 올리버가 모유 수유 캠페인 관련 인터뷰에서 모유 수유에 대해 "It's easy, it's more convenient, it's more nutritious, it's better, it's free."라고 말해 많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모유 수유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직접 경험해 본 적 없고 경험해 볼 수 없는, 의료계 종사자도 아닌 사람이 할 이야기는 아니지. 얼마 전 피드에 떠서 읽게 된 글이 하나 있는데 제목은 "Can I lie about switching from breast milk to formula?", 즉 "분유를 먹이기로 했는데 계속 모유 수유한다고 거짓말해도 될까요?" 다. 많은 사람들이 모유 수유를 권하며 제이미 올리버처럼 쉽고 아기에게 더 좋다고 하기 때문에 젖이 잘 안 돌거나 아기가 젖을 안 물거나 너무 힘들거나 내 삶을 더 누리고 싶거나 등등 다양한 이유로 분유 수유를 택하는 엄마들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가장 첫 걸음부터 아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부족한 엄마라고. 내가 "젖이 모자라지는 않냐"는 질문에 불편함을 느낀 것 역시 그 영향일 것이다. 

    운 좋게도 나는 모유와 분유 모두 가능한 상황이라 선택할 수 있었다. 현재 대략 모유 직수:모유 젖병 수유:분유 젖병 수유=5:3:2 정도의 비율로 하고 있는 것 같다. 모유 젖병 수유는 수동이나 전동 유축기를 쓰는 건 아니고 한쪽 가슴을 수유할 때 다른 쪽 가슴에서 나오는 젖을 haakaa라는 실리콘 컵을 이용해 모아서 준다. 내가 너무 피곤할 땐 J가 분유로 보충 수유를 해준다. 6개월까지는 직수를 계속 하고 싶은데 때때로 내가 모유 수유를 고집하는 게 오히려 우리 가족을 피로하게 하는 건 아닌가 (회복 기간이기도 하지만 내가 모유 수유를 하면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어 집안일은 J의 몫이 되었다) 싶은 생각도 든다. 똑똑한 척, 모유든 분유든 잘 먹이고 잘 크면 아무 문제 없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모유를 먹이는 게 아기한테 좋다던데.. 하며 그 말을 무시할 수가 없는 거다.

    모유 vs. 분유 뿐만 아니라 아기를 키우며 끝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어떻게 해도 후회는 남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봤다. 그래도 하나 분명한 건 아기 엄빠가 아기와 엄빠를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면 그 선택이 무엇이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고, 제 3자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 젖은 제가 알아서 할 거고요, 아기는 잘 크고 있어요!"

     

    제이미 올리버 관련 가디언지 기사: 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16/mar/20/jamie-oliver-breastfeeding-advice-cancer-women
    모유 수유에 대해 거짓말을 해도 될 지 고민하는 엄마 기사: slate.com/human-interest/2021/01/breast-milk-formula-lying-care-and-feeding.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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