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내가 홀로 기거했던 아파트를 지나칠 때면
옛 애인의 전화번호가 바뀐 줄 뻔히 알면서 다이얼을 돌려보듯
그 방을 올려다 보곤 한다 밤새
불을 밝힌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방안의 나
그 생생했던 현실감을 텅 빈 실루엣을 바라보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나를 떠나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구겨진 회수권처럼 세운상가를 떠돌던 제복의 음울함이라든가
이태원 디스코텍 라이브러리의 사이키 불빛 아래
심해어처럼 發光하던 내 몸짓, 그 어느 순간도
나라는 현실감의 絶頂에서 비껴나 있어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양파껍칠처럼 벗겨져 사라져버린
무수한 내 현실감의 절정들을 추억하는 일일 뿐
한 사람을 사랑하여 죽음을 생각하던 고통
그 사람을 위해 아흔아홉편의 연시를 쓰던 손가락의 떨림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허물벗는 양파처럼 나는 나를 허물벗으며 간다
함부로 내뱉었던 숱한 사랑의 말들도
진실보다 거짓이 뜨겁게 진실했던 욕정도
청춘이 생의 전부인 양 늙음을 박대했던 한 시절도
벗어놓은 허물처럼 사라졌다
얼마나 나를 잃어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나는 매일 나의 낭떠러지를 살고 있다
한발짝 걸음을 옮기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그 캄캄한 생의 허방 앞에서, 어제의 내가 그랬듯
한갓 양파껍질이 될 현실감의 절정을 붙잡고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 껍질의 독한 향기에 취해
한때 저 방안에 살았던 헛것의 구체성을
살덩어리의 따스했던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