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유하 '오래 전 내가 살던 방을 바라보며'
    임시폴더/문학소녀인척 2012. 2. 11. 13:03

    오래 전 내가 홀로 기거했던 아파트를 지나칠 때면
    옛 애인의 전화번호가 바뀐 줄 뻔히 알면서 다이얼을 돌려보듯
    그 방을 올려다 보곤 한다 밤새
    불을 밝힌 채 누군가를 기다리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방안의 나
    그 생생했던 현실감을 텅 빈 실루엣을 바라보다 그런 생각을 한다
    얼마나 나를 떠나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구겨진 회수권처럼 세운상가를 떠돌던 제복의 음울함이라든가
    이태원 디스코텍 라이브러리의 사이키 불빛 아래
    심해어처럼 發光하던 내 몸짓, 그 어느 순간도
    나라는 현실감의 絶頂에서 비껴나 있어본 적이 없었으나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기껏 양파껍칠처럼 벗겨져 사라져버린
    무수한 내 현실감의 절정들을 추억하는 일일 뿐

    한 사람을 사랑하여 죽음을 생각하던 고통
    그 사람을 위해 아흔아홉편의 연시를 쓰던 손가락의 떨림도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다
    허물벗는 양파처럼 나는 나를 허물벗으며 간다
    함부로 내뱉었던 숱한 사랑의 말들도
    진실보다 거짓이 뜨겁게 진실했던 욕정도
    청춘이 생의 전부인 양 늙음을 박대했던 한 시절도
    벗어놓은 허물처럼 사라졌다

    얼마나 나를 잃어야 나를 만날 수 있는가
    나는 매일 나의 낭떠러지를 살고 있다
    한발짝 걸음을 옮기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그 캄캄한 생의 허방 앞에서, 어제의 내가 그랬듯
    한갓 양파껍질이 될 현실감의 절정을 붙잡고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 껍질의 독한 향기에 취해
    한때 저 방안에 살았던 헛것의 구체성을
    살덩어리의 따스했던 감촉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임시폴더 > 문학소녀인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호승 '항아리' 中  (0) 2012.07.11
    박노해 '나는 나를 지나쳐왔다'  (0) 2012.07.05
    이옥봉 '몽혼'  (1) 2012.02.11
    최영미 '선운사에서'  (1) 2012.02.11
    한명희 '끝이라는 말'  (0) 2012.02.11

    댓글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