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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내일 쓸 시'임시폴더/문학소녀인척 2024. 2. 7. 13:34
내 안에는 굉장한 자질이 있어요. 엄마,
나는 내 생애 최고의 시를 쓰고 있어요*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자살한 시인의 일기를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최고의 작품을 남기고 죽었을까요
그녀의 일기장은 칠백 페이지 넘게 두꺼워요
저는 요즘 일기를 쓰지 않아요
당신이 남긴 편지에 답장도 못 했죠
쩔쩔매며 시에 매달리지만 시를 못 쓴 채 행사는 해요
어제 두 시인과의 낭독회가 끝날 무렵
객석에서 독자가 제게 질문했어요
"지금까지 쓴 작품 중에서 대표작은 뭔가요?"
조금 머뭇거리다 저는 답변했답니다
"제 대표작은 아직 못 썼습니다. 내일이나 모레 쓸 예정이에요."
대개 작가들이 하는 농담이죠
정밀하게 시간이 흘러도 내일은 지연되죠
누가 뭘 가지고 도착하든
지구가 태양과 멀어지고 있는 시각입니다
여전히 저는 아무하고도 같이 살 수 없지만
어머니, 저는 시가 제 생애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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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즐겨봤던 주간 문학동네를 포함 문학동네는 종종 재밌는 일을 벌인다. 우리는 시를 사랑해 - 매주 시를 보내준다기에, 배우 박정민이 함께 한다기에 흥미가 생겨 구독했다. '내일 쓸 시'는 이번 주 내 메일함에 들어온 시. 박정민의 말처럼 직업의 성과와 삶의 성과가, 직업의 자격과 삶의 자격이 동일하지 않은데. 일을 잘 하고 싶지만 나도 정말로 일이 내 생애 전부가 되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 삶을 잘 가꾸고 일이 없어도 그 무언가 내 것인 나의 삶을 살고 싶다. 이 시가 실린 책의 제목은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이라는데, 제목에 마음이 끌린다. 시에 담긴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도 궁금해지고.
+
정밀하게 시간이 흘러도 내일은 지연되죠
미국 오면 갓생 살기로 거듭 마음 먹던 캐나다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라 좀 찔리는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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